2006, 운현궁
운현궁은 이곳에서 태어난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그냥 외척이 사는 집이다. 고궁의 화려함은 없지만 색을 칠하지 않아 단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로당은 안채의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한 면만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뒤로 ㅁ자 모양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아녀자의 바깥출입을 통제하였고 안채는 여러가지 일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지녀야 했고 그러한 일을 하는 모습이 바깥에 노출되어서도 안되었다. 결국 ㅁ자모양의 폐쇄적 구조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중전이 간택이 되면 바로 궁궐로 들어가지 못하고 왕실의 법도를 배워야 하는 데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그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에 뒷뜰로 가는 문이 있는 데 문의 가장자리를 커튼 내지는 액자처럼 장식해서 문을 넘어 바깥을 보면 액자 속의 그림 같이 바깥이 보이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이곳을 설명해 주시는 분 말대로 우리 조상님들이 정말 '멋스럽게'사셨는 지 모르겠다.
운현궁의 건물들에는 老라는 글자가 들어있다.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 처럼. 흥선대원군이 아들 잘 둔 덕에 늙어서 호강한다고 붙였다고는 하지만 임오군란의 실패로 청나라에 끌려가기도 했던 그분이 늙어서 호강을 하신 건 지는 잘 모르겠다. 세도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바보 행세를 했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호강일지는 모르겠지만.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고 노락당이라는 현판은 한석봉과 함께 우리나라의 2대 명필중 한 분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한다. 이곳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가례가 올려졌던 곳인 데 지금은 전통 결혼식장으로 빌려주고 있었다. 여기서 결혼실을 하면 결혼식 하객들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하려나?
이로당이 여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노안당은 대원군이 거처하던 사랑채였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고 king maker였던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왕권을 키워서 '종묘 사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를 논의했다고 한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사원을 철폐하는 등의 일들이 이곳에서 논의 되었을 지 모르겠다. 노안당이라는 현판도 물론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이다. 사진을 다시 보니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합각 문양같은 장식이 꽤 특이해 보인다.
한옥의 앞마당은 풀이 심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결혼식 등의 행사를 치를 수도 있고 여름 저녁때는 모기불을 피워놓고 시원하게 식사를 하거나 가을엔 고추를 말리는 등의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한다. 식물은 오히려 뒤에 꽃계단을 만들어 심어 놓는다. 뒤뜰에 식물을 심어 놓으면 식물이 있는 부분에 기온이 내려가고 서늘한 곳에서 보관해야 하는 물건을 위한 창고 등도 건물의 뒤쪽에 내지는 꽃계단의 밑을 뚫어서 만들게 된다. 이러한 구조가 빛을 발하는 건 역시 여름일 것이다. 들문으로 만들어져서 문들을 모두 틀 수 있게 되어 있고 앞마당은 햇빛이 비쳐 뜨거워지고 뒷 뜰엔 나무가 우거져 온도가 낮으면 집을 통과하는 바람이 만들어 진다고 하니. 겨울의 온돌과 함께 여름의 통풍 시스템에도 감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신(臣)권에 비해 크게 약해져버린 왕권을 세워 더이상 허수아비가 아닌 강력한 왕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고종을 허수아비처럼 조종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세워보려고 했다. 문제는 자금. 엽전 1개가 100개의 가치를 갖는 당백전을 발행하여 자금을 모았다. 무시무시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정책인데 결국 그 자금으로 경복궁은 중건이 되었다. 당백전을 실물로 보니 너무 싸구려 같아 도저히 100배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