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창경궁과 종묘는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쁘게도 한군데의 입장권을 사면 다른 한군데도 볼 수 있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종묘쪽으로 가면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음식물의 반입을 삼가고 조용히 해달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러나 불행히 종묘 앞에는 종묘공원이 있고 늘 이런 저런 것들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시위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종묘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될 때 유네스코의 심사관들도 이 다리를 건너 종묘에 들어와서 정전까지만 보고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 내가 종묘를 찾은 순간도 종묘 앞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으니. 종묘에서 개최되던 씨름대회가 폐지되어 중계차를 들여보내기 위해 담장이 허물어지고 종묘가 각종 쓰레기로 뒤덮혔던 것에 비하면 나아졌다고 해야 하는지. 그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종묘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외대문의 모습이다. 종묘는 신성한 곳이어서 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붉은색과 연두색의 단청만이 있을 뿐. 단청의 색이 다르다는 것과 함께 종묘의 외대문이 가진 특징은 문의 윗부분이 구멍이 나 있는 창살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고 영혼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멍을 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외대문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길은 가운데가 높고 양쪽에 그보다 낮은 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삼도로 되어 있다. 그러기는 여느 고궁도 마찬가지 이지만 종묘에서는 가운데 길이 왕이 아닌 신이 다니는 길이 된다. 제사를 지내는 왕은 옆길을 그리고 제사를 지내러온 제관은 반대편 길을 걷게 된다.
종묘에는 공민왕의 신당이 있다. 원나라에 항복하고 고려의 왕들은 忠을 왕호에 넣었어야 했고 몽고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야 했다. 공민왕은 몽고의 노국공주를 왕비으로 맞았지만 이름을 공민왕으로 짓고 자주노선을 택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신돈이라는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고 공민왕도 다시 주목을 받은 듯 하다. 그림도 잘 그렸고 했던 인물인 것 같은 데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는 뭔가 구심점을 잃어버린 듯 개혁을 제대로 밀고나가지 못한 듯 했다. 하여간 공민왕 뒤로 고려에는 우왕 창왕 같은 왕이 있었지만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을 공민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신은 공민왕의 고려를 이어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종묘에는 공민왕의 신당이 있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그림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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