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의 전사청이라는 건물이다. 고궁의 건물들은 모두 현판이 걸려 있으니 이 건물에도 '전사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음직 한데 걸려있지 않다. 종묘는 왕과 매우 제한된 사람들 만이 드나드는 장소였다. 굳이 현판을 걸지 않아도 누구나 어디가 뭐하는 건물인지 달 알기 때문에 현판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니 당연히 제사 음식이 필요하다. 제사 음식은 모두 요리를 하지 않고 생으로 올렸다고 한다. 육류의 경우에도 죽은 것을 가져오지 않고 이곳에서 도살을 해서 올렸다고 한다. 제사 음식의 관리도 엄격해서 비실비실한 소를 공급했다는 이유로 어느 관리가 귀양을 간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하는 데...
좌우 폭이 100m가 되는 19칸의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종묘 정전의 모습이다. 각칸마다 왕을 한분씩 모시고 있다. 원래는 태조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셨다고 하지만 점점 증축이 되어 현재의 19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종묘를 보면 조선의 건축의 역사를 모두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은 모두 27분이 계시니 8분의 행방이 묘연하다. 사실 이곳은 일종의 명예의 전당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임금만이 이곳에 머물 수 있고 결국 후대 왕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고 영녕전으로 누군가를 옮겨야 한다고 한다. 결국 정치적 파워 게임으로 힘없는 누군가가 자리를 내 주었어야 했다나?
종묘에 있는 공신당이라는 건물이다. 정전에 모신 왕 중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지는 분은 결국 파워게임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왕의 입장에서야 다 같은 조상님인데 누구를 옮길 것인가? 결국 그 파워게임은 신하의 몫이 되고 만다. 정전 옆에는 공신전이 있어 정전에 모신 왕이 통치할 당시에 공을 세운 사람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영녕전에는 공신전이 없다. 결국 정전에 있던 신위가 영녕전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분의 공신이었던 신하의 신위가 갈 곳은 없어지고 말게 된다. 그리고 그 후손은 자신의 조상의 신위가 없어지지 않도록 결사적으로 사수하게 된다.
정전에서 밀려난 왕의 신위가 오게되는 곳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모두 14칸. 정전이 19칸이니 35칸이 되고 조선의 왕의 숫자보다 많다. 그 이유는? 왕에 즉위를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던 왕들이 자신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으로 추대하여 신위를 이곳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들은 정전의 제사는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영녕전의 제사는 가끔 세자에게 대행을 시켰다고 하니 이곳에 모신 것을 꼭 효도라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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