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에 전시된 유물들은 모두 복제품이고 진품은 국립 공주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무령왕릉을 나와 국립 공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안내 지도 상으로는 매우 가까운 곳인 데 잘 보이지 않아 무령왕릉 입구에서 표파는 아저씨한테 물어봤다.
나: 여기서 박물관은 어떻게 가죠?
아저씨: 주차장에서 우회전이요.
이 말을 듣고 갔는 데 주차장 옆에 박물관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옆길을 쭉 따라서 10여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는 데 유적 지역이라 길을 돌아가야만 하는 게 좀 귀찮긴 했지만 가는 길에 복원해 놓은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이 있어서 그래도 발품이 아깝지 않게 해 주었다.
충청도시정사의 건물이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공주로 옮겨왔고 그때 그 내부의 건물로 지어진 건물이 선화당이라고 한다. 지금은 옆에 국궁장이 들어섰고 활쏘는 법을 가르치는 교실로 활용되고 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에는 공주에서 발견된 유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지역 사람들이 이곳 선화당을 개조해서 박물관으로 꾸몄다고 한다. 후에 무령왕릉이 발굴되고 대규모의 국보급의 유물이 출토되어 뒤에 공주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은 박물관으로의 수명을 다했다고 하는 데.
국립공주박물관은 작년에 개관한 아주 삐까뻔쩍한 건물이었다. 바깥에는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각종 불교관련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많은 외침으로 많은 문화재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런 공간을 만들만큼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한 것 같다. 물론 화강암의 강한 생명력도 한 몫 했겠지만.
국립 공주 박물관의 내부는 1층은 무령왕릉을 테마로 2층은 무령왕릉 이외의 유물을 모아 꾸며 놓았다. 1층은 무령왕릉을 테마로 조금 어둡게 그래서 왕릉 속에 들어와 있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게 꾸며놓았다. 벽면도 송산리 고분의 모형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지만 박물관은 돌로 만들었다. 사진에 찍힌 물건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물건들로 일단 금속 숟가락이 보인다. 고대부터 한중일 3국 중에 우리나라만 금속으로 수저를 만들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뒤에는 무령왕릉이 무령왕릉이었다는 걸 알게 해준 지석과 너무 생생한 모습이라 발굴하던 고고학자를 놀라게 했다는 돌로 조각한 짐승의 조각이 있다. 뒤에는 출토된 못조각과 나무조각으로부터 복원한 무령왕을 담았던 관이 보인다. 무령왕을 담은 관은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이라는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령왕의 관은 금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에 자생하는 소나무 품종으로 고급 목재여서 일본에서 지체 높은 사람들이 관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고 한다. 웅진으로 피난을 왔지만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문물이 융성해서 고급 수입품 재료로 관을 만들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송산리 고분군 마당에는 일본에서 금송을 한그루 가져다 심어 놓았는 데 불행히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토양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은 모양이다.
일본어 선생님께 일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 일본 황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글쎄요. 어쩌면 한국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요.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와서 백제의 고분을 참배하고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요.
실제로 무령왕릉 전시실에는 일본 왕족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 기증한 물건이 전시실 한켠에 놓여있다. 그런가 하면 웅진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백제의 성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여 쪽으로 자주 사냥을 다니면서 백제를 강대국으로 만들고 강대국에 걸맞는 넓은 수도를 건설하려고 수도를 옮긴 부여를 보고 싶어졌다. - 현재 공주는 대전의 위성도시로 그나마 정착하여 인구 10만은 넘어 市이지만 부여는 인구가 10만이 되지 않아 아직 郡이라고 하니 꼭 터가 넓어야 도시가 크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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