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성이 모태가 되고 조선시대에 개축한 성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도읍이었던 위례성을 잃은 백제의 문주왕 - 삼국사기에 이 분이 좀 소심했다는 표현이 있다.- 은 외적방어에 유리한 웅진-지금의 공주-로 도읍을 옮긴다. 조선시대에도 이 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것이 인식되어 선조, 인조시대에 성을 쌓아 올리게 된다. 강화도의 고려궁터마저 원래의 모습은 별로 남아있지 않고 조선시대의 도호부터의 흔적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처럼 이곳도 웅진성의 모습보다는 조선시대의 산성의 모습으로 강하게 남아있다. 그나마 많이 파괴되어 아직도 많은 곳이 복원공사 중이고 정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는 1993년 복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공주의 공산성은 조선시대의 역사에 더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인조때 이괄의 난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인조는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여기에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는 데 이곳에서 이괄의 난이 진압이 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난이 진압되자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건물이 雙樹亭인데 이 이야기보다 더 크게 이곳은 '인절미'의 본고장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인조 임금이 이곳에 왔을 때 임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콩고물을 묻힌 찹쌀떡을 진상했고 그 떡을 먹어본 임금이 이름을 묻자 특별히 이름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인조 임금은 이렇게 맛있는 떡에 이름이 없다니라고 하며 임씨가 진상한 빼어난 맛이란 뜻의 임絶味로 이름을 붙였고 오늘날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괄의 난보다는 재밌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수리중인 건물을 바라보는 아쉬움을 채우긴 좀 부족했다.
이괄의 난과 쌍수정에 얽힌 이야기는 후에 사적비가 되어 쌍수정 옆에 비각에 둘러쌓여 놓여 있다. 비각은 다시 복원한 듯 했지만 비문은 원본인 듯 했다. 비석은 숙종 때 세워졌고 비문은 당시에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글씨라고 한다. 얼핏 스치는 기억으로는 남구만이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의 작가인 것 같다.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니 조선 최고 관직에 오른 정치가보다는 아이에게 훈계하는 할아버지로 느껴지지만.
공산성 안에 백제의 왕궁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그나마 넓고 평평한 곳이고 사진 뒤쪽으로 덮이는 뚜껑이 있는 건물이 사실은 우물 비슷한 연못인 데 그 안에서 백제시대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을 백제의 왕궁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고 한다. 그래도 피난가서 지은 살림이라고는 하지만 왕궁 치고는 좀 작고 돌우물(?) 이외에 별다른 흔적이 없어서 안타깝다. 누가 그랬듯이 백제의 유적은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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