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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리고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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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강화, 전등사 Part 1 고구려 소수림왕이 만들었다는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후에 정족산성이 되고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이다. 그래서 전등사 안에는 양헌수 장군의 추모비각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가 두었는 지 모르겠지만 동자승인형들이 놓여 있다. 사진은 전등사의 대웅전에서 찍었다. 1000년 이상의 역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러번 개축을 반복한 절인 듯 하다. 건물 자체로는 바깥 벽에 그려놓은 벽화들과 건물 내부 천정의 장식 등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국사책에 나오는 정족산성의 모습이다. 병인양요때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과 싸웠던 곳인 듯 하다. 막연한 생각으로는 초지진 등의 요새에서 대포로 프랑스 군함을 격침시킨 것이 아닌가 싶었는 데 지상전이..
2006, 강화, 향교, 온수리 성공회 이전에는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겠지만 지금은 여고에 부속되어 전통 예절을 가르치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는 듯 했다. 북문에서 만나 이곳까지 안내해준 아저씨 말로는 이 곳을 관리하는 분이 어디 가서 저녁때나 돌아온다고 하셔서 겉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속은 담너머를 쳐다보는 정도로. 초등학교때부터 배운 강화도의 2대 특산품은 인삼과 화문석이다. 인삼은 차양을 씌워 산에서 크는 것 같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데 요즘엔 검정색대신 파란색 차양도 많이 쓰는 것 같다. 전등사를 찾아간 온수리에도 구한말의 성공회 교회가 남아 있었다. 강화도 성공회와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었고 합각에 새겨진 문양이 제법 눈길을 끌었다. 물론 한국식 건물에 십자가를 세워둔 건 신기했고. 서울에서는 이제는 볼 수없는 논에 물..
2006, 강화, 강화 산성 강화산성도 산성이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문들은 남아 있다. 북문은 진송루라고도 한다. 그래도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달리 옆에 성이 조금 붙어 있는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북문에서 언덕을 내려오면 강화산성의 서문이 나온다. 광화문처럼 문의 아치 안쪽으로 천장화가 그려져 있다. 성하면 성벽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터라 일본에 오기 전에는 당연하게 느껴졌겠지만 해자로 주위를 방어하고 성을 높이 쌓는 일본의 성에 익숙해진 다음에 다시 보니 나름대로 신기해 보였다. 관광안내소 할아버지 표현대로 왜놈들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위치이다. 정확하게는 사진에 보이는 아치형 다리 뒤에 있는 벌판이 그 위치이다. 바다에서 거리가 꽤 되는 데 함포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니 소리가 크기는 한 것 같다. 임진왜란때만 해도 함..
2006, 강화, 고려궁지 원래는 고려에서 개성의 왕궁을 본따서 만든 궁터이지만 폐허가 되었고 조선시대에 강화 유수부를 이곳에 만들면서 고려 궁터의 배치를 어느정도 이용하였다고 하는 데 그마저도 병인양요때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유수부 건물 안에는 유수와 6방을 맡은 사람들의 인형이 들어 있다. 우리가 지하철 사오고 고속전철 사오면서 계속 달라고 졸라도 안주는 책들은 원래 이런 건물 속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몽고침입이후 강화도는 왕들의 피난처가 된 듯 하고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했던 사실이 있어서인지 이곳에는 책과 함께 은괴도 보관했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군인들은 책과 함께 은괴도 훔쳐가고 건물은 불질렀다. 지금 건물은 복원한 것이고. 고려 궁지에 유수부의 동헌과 외규장각과 함께 남아 있는 건물인 이방..
2006, 강화도에 가다 강화도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했다. Lonely planet에서는 여러 가이드북에 과대평가되어 있어 실제로 보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지만 서울의 정신없는 모습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에게는 서울과는 다른 느낌을 줄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하여간 넓게 펼쳐진 김포평야를 지나 이곳에 도착했다. 관광안내소가 닫혀 있어 당황했지만 안내하시는 분이 식사하러 가신 듯 한 시간이어서 나도 점심을 먹고 왔더니 와 계셨다. 할아버지셨는 데 설명을 잘 듣고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구를 걷는 법에서는 별세개로 이곳을 추천하고 있지만 보통 한국 사람이 봐서는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역시 재래시장은 외국에서 구경해야 분위기도 팔고 있는..
2006, 인천, 연안 부두 서해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배들을 타는 곳이다. 보따리 무역의 허브?인데 터미날 내부에서는 화물의 포장이 금지되어 있어 터미날 앞에서 사람들이 보따리를 포장한다. 셀로판 테이프를 뜯는 찍찍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중국의 대련항까지 일반실 왕복요금이 20만원 정도 였는 데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체로 인천 앞바다에 있는 백령도, 대청도 같은 곳까지 가는 배가 떠나는 곳이지만 제주도까지 가는 배도 있는 듯 했다. 몇시간이나 걸릴지... 터미날 옆으로는 갑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나무 바닥의 공원과 운동기구들이 있다. 생각보다 작아서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정박한 배들이 보이는 바닷가는 좋은 느낌을 준다. 사진에 담은 돌고래 모양의 조형물은 원래 음악 분수 였는 ..
2006, 인천, 월미도 인천의 대표적 관광지인 월미도. 일본의 요코하마나 고베에서 인천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면 바닷가를 따라 만들어진 공원과 놀이공원 그리고 차이나타운, 옛날식 서양 건물을 가진 항구도시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인천역에서 월미도행 버스를 타고 내려 이곳을 통과하면 데이트의 명소? 월미도 공원이 나온다. (이곳을 본 어느 일본 사람의 글) 인천이라는 새로운 국제공항이 있는장소. 라고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대부분은 공항 고속도로로서울로 직행하기 때문에 인천시 자체는 실제로 가본사람은 적을거라고 생각합니다.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의 무대가 된 마을, 그외 많은 영화의 로케가 되었던 도시 입니다만, 조금 낡은 느낌이 있는 구시가로, 꽤나 흥미있는 도시입니다.옛날에는 부산 만큼 중요한 항구였지만 요..
2006, 인천, 개항장 인천의 명동성당이라고 주장하는 답동성당의 모습이다. 좌우 대칭형의 건물의 외관에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지만 원주 기둥으로 두르고 예수의 고난을 주제로 한 액자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한 내부는 훌륭했다. '제물포조약길'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근대식 서양 건물이 몇개 보인다. 이 건물도 그중 하나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나고 흥선대원군은 청의 도움을 요청하여 집권한다. 그리고 33일만에 일본이 군함 몰고 와서 그 체제를 와해 시키고 그때 입은 일본인 피해 보상 받아내고 까불면 인천을 먹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조약을 맺는다. 임제?라는 시인이 있는 데 그 시인의 이름을 연상시키며 외우라는 이상한? 학습법으로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하여간 잊지 말자는 뜻인 지 몰라도 아픈..
2006, 인천, 신포 문화의 거리 자칭 인천의 명동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신포 문화의 거리의 모습이다. '나름대로' 세련된 상점가의 모습이 느껴지기는 하는 데 어딘지 활기가 별로 없고 새끈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한 느낌을 받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재래시장이지만 뚜껑이 있는 아케이드가 신기했다. 러시아어로 써있는 간판. 옆으로 터진 골목이 2군데 있고 들어가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 한군데는 둘러싼 건물들을 파랗게 칠하고 가운데 빨간 등대 모형을 세워 두고 한 면을 조금 유치한 부조로 장식하고 있었고 다른 한군데는 그리스 풍의 흰 건물로 둘러 싸고 가운데 이곳이 개항시기에 청나라 사람이나 일본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푸성귀전이었다는 걸 알리는 동상이 있는 형태였다. 흰 건물로 둘러진 광장에 상록수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제법 세련되 보였다. 이..
2006, 인천, 자유공원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의 모습이다. 이전에 있던 조그마한 자유의 여신상은 어디로 도망갔고 이런 놈이 들어서 있었다. 모양을 봐서 별로 잘 못 만든 것 같다. 안 예쁘다. 우리가 미국이랑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수교를 한 걸로 알고 있는 데. 불평등 조약인데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이런 탑을 만들어 놓았는 지... 현재 철거 논쟁이 뜨거워서? 경찰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동상이다. 한쪽에서는 작전상? 한국의 양민도 학살했던 태평양 전쟁 후에 일본이 불쌍하다고 일본 전범들 많이 살려주고 일본을 위해 우리나라에 불리한 결정을 많이 내렸던 인물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한번 뒤집어 주었다는 이유 만으로 이곳을 장식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논쟁이었다. 한미간의 외교문제로 까지 비화가 되고 미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