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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부여 왕릉원 아트 뮤지엄 부여 왕릉원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도 무덤처럼 생겼다. 그냥 박물관이라는 이름 대신에 아트 뮤지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내부 전시물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안에 유물은 없고 유물 유적은 모형이나 3차원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가운데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금동대향로나 부여 고분군의 사신도 관련 영상을 틀어 준다. 청룡이 색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면 이런 모습인 것 같다. 왕릉 옆에는 부여로 수도를 옮겼지만 신라 진흥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성왕을 기르는 능산리사가 있었고 중앙에 큰 목탑과 1금당으로 구성된 절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유명한 금동 대향로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고 절의 모형은 박물관 한 쪽에 전시되어 있다.
2024 부여 왕릉원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지도 앱에서 찍어보니 걸어가려면 1시간 가까이 걸려서 택시를 이용했다. 구드레 조각공원에서 왕릉원까지는 8000원정도 나왔고 시간은 8분 정도 걸렸다. 고분군은 발굴 중이라 별로 볼 것도 없는데 입장료를 받는다는 불만을 읽은 적도 있는데 입장료는 1000원으로 저렴했고 내부의 볼거리도 충분히 그 값은 하는 것 같았다. 고분군 중 하나는 문이 발굴이 되어 노출되어 있다. 대신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언덕 너머 쪽에 같은 크기의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벽돌 무덤으로 유명한 공주의 무령왕릉도 같은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백제 고분 특징인 굴식 돌방 무덤이었다. 횡혈식 석실분이 내가 고등학교 갈 당시에 굴식 돌방 무덤으로 용어가 바뀌었는데 어렵기는 마..
2024 부여 황포돛배 낙화암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람선을 타는 것 같다. 고란사 옆에 선착장이 있고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을 볼 수 있다. 유람선은 고란사에서 구드레 나루터까지 10분 정도 운항하고 승선료는 6000원이었다. 때 마침 유람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유람선을 타러 내려갔다. 유람선에는 서동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드라마 서동요로 유명해졌는데 서동이 선화를 사귄다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얻었다는 이야기인데 요즘도 어려운 동서화합을 전쟁하는 적국인 상태에서 했다는 게 더욱 놀랍다. 유람선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나무로 꾸며져 있다. 유람선 바깥은 이렇고 갑판에서 낙화암을 볼 수 있다. 낙화암은 강에서 바라보면 이렇다. 사진에 잘 나오지 않았지만 빨간색으로 낙화암이라고 써 놓은 글씨가 있..
2024 부여 부소산성 고란사 낙화암 옆에는 고란사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절벽에 위치하고 있어서 좁기는 하지만 지형과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서 강에 떠 있는 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중심 건물은 극락보전이고 통통한 모습의 금동 3존불상이 있다. 스님이 염불을 외우고 계셨는데 어딘지 가려고 나오시면서 사진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고란사 건물 벽면 중 하나에는 삼천 궁녀가 몸을 던지는 것을 묘사한 듯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란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약수일 것 같다. 약수 안쪽에 적외선 살균기가 작동되고 있고 수질검사 필증도 붙어 있어서 믿고 조금 마셔봤다. 물맛은 좋았다. 안쪽에는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안에는 토속신과 함께 부처님도 모시고 있는 듯 했다. 구석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범종을 1번 치고 소원을..
2024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 부소산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낙화암이다. 3천 궁녀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나 그에 따라 이름이 붙어진 낙화암은 아마 후대 사람들이 붙였을 것이다. 낙화암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다. 살짝 올라가는 길이 험하고 신발을 잘못 놓아 굴러 떨어지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백화정은 일제시대였던 1929년 부여 군수였던 홍한표라는 분이 만들었다고 한다. 백화정에 오르기 전에 아래를 보면 이런 화면이 펼쳐진다. 몸을 던지려면 많이 뛰어야 하겠지만 아파트 10층 높이 쯤 되는 30 m 높이의 절벽인 것은 사실이다. 백화정에서 바라본 금강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금강 뒤로 산세가 완만한 산들이 겹겹이 보여서 더욱 멋지다고 느낀 것 같다. 낙화암으..
2024 부여 부소산성 삼충사 부여의 부소산성에 들어갔다. 문에는 사비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입장료는 2000원이었다. 부소산성에는 13 곳의 볼거리가 있고 한 바퀴를 도는 데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는데 모두 보지는 못했고 사비문에서 가까운 삼충사를 보고 낙화암과 고란사를 보는 코스를 설정했다. 삼충사는 백제 말의 3대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바깥 쪽 문에는 의열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의열문을 들어가는 충의문이라는 2번째 문이 나온다. 삼충사 사당에는 3사람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누군가의 상상에 의한 작품일지도 모르겠지만 성충은 이렇게 생겼던 것 같다. 좌평이었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옥중에서 단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흥수는 이렇게 생긴 분인데 나장 연합군의 공격 때 탄현을 지키다가..
2024 부여 동헌 부여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일 것 같다. 부소산성 앞에는 조선시대 부여현의 행정을 보던 관청인 부여 동헌이 있다. 부여 동헌의 가장 큰 건물은 22칸 규모의 부여 객사이다. 중앙 건물이 있고 좌우에 날개가 1자로 배치된 구조로 되어 있다. 부여 현령이 업무를 보던 곳보다 손님을 위한 공간이 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것 같다. 부여 현령이 업무를 보던 공간은 초연당이다. 건물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대청 마루에 앉아서 쉬어 갈 수는 있게 되어 있다. 단청을 하지 않아서 관공서가 아닌 민간 가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객사와 초연당 이외에도 아사, 군기고, 향청, 작청, 현사 등의 건물들이 주변에 남아 있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사진 속 어미개가 강아지 2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태극..
2024 부여 정림사 2, 부여 돈까스 정림사에서 옆 쪽 언덕을 올라가면 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 앞에는 이런 기념물이 있다. 정림사를 포함하여 공부, 부여, 익산의 백제 역사 유적지구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유네스코 기념비를 지나면 정림사지 박물관이 나온다. 2024년 1월에는 별도의 입장료 없이 관람할 수 있었다. 내부의 전시공간은 정림사에서 출토된 작은 유물들이 네모난 유리 상자에 하나씩 담겨 바둑판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조명이 어둡게 되어 있어서 해리포터에 나온 한 장면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났다. 경주 남산에서 문화 해설사 분께서 신라 남산은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도 홀대를 받는데 백제는 워낙 문화재가 귀해서 돌조각 하나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불평을 하셨는데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정림사를 보고 나서는..
2024 부여 정림사 1 교과서에 백제의 탑이 2개가 나오는데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이다. 현존하는 탑은 그 2개 밖에 없고 미륵사지 석탑이 일부 파손되었으니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탑은 정림사지 석탑이 유일할 것 같다. 이놈은 국보 9호로 지정되어 있다. 판의 끝을 미세하게 접어 올리고 탑신의 비율과 판의 비율을 다르게 설정하여 아래서 보았을 때 탑이 더 높아 보이는 효과를 유발했다고도 한다. 유홍준 교수님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꼽기도 하셨다고 한다. 정림사지 석탑 한쪽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글을 세겨 놓았다고 한다. 뒤에 있는 건물에는 석불이 들어가 있다. 둥글둥글하지만 어딘지 촌스러운 모습인데 백제인의 작품은 아니고 고려시대의..
2024 딜쿠샤 독립문 옆에는 딜쿠샤라는 건물이 있다. 일제시대에 테일러 가족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3 1 운동 당시에 부인이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고 기미 독립선언서를 병실에 숨겨 주었고 한 장 신발에 숨겨 나와서 해외에 사실이 전해지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깔끔하게 단장된 양옥집이지만 한동안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무허가로 사람들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딜쿠샤라는 이름이 메우 특이한데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고 시편의 한 구절을 정초석에 적어 놓았다. 이 자리에는 원래 권율 장군의 생가가 있었고 신성한 보호수가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양옥집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하고 그런 걱정을 불식시키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 내부에는 당시의 집기를 고증해서 재현을 ..